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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안개" 猫さん | 2006.03.03 15:21 | 조회 0 | 신고

기형도의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니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헤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는 우리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삶의 질을 현저히 향상시켜 놓았지만, 각종의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자연 환경의 파괴와 상부 상조의 전통적 관습의 붕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산업화, 도시화의 폐해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서정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소재를 사용하여 산업화의 부정적 양상을 역설적으로 비판한 시의 기법이라든가, 안개를 의인화하여 그것이 얼마나 공단 주변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으며 엄청난 파괴력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드러내 보인 솜씨는 높이 살 만한 것이다.
시인은 산업화의 부정적 양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 거기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이나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여공의 겁탈과 취객의 동사 사건을 '사소한 사건', '개인적인 불행'으로 단정짓는 것은 시인의 판단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감각에 대한 분노의 반어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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