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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노 학난성 유래

소년이노 학난성 유래좀 알려주세요 ㅠㅠ

익명 | 2008.08.23 23:49 수정됨 최초등록일 2008-08-23 20:08 최종수정일 2008-08-23 23:49 | 조회 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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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로 학난성 []


    : 젊을 소
    : 해 년
    : 쉬울 이
    : 늙을 로
    : 배울 학
    : 어려울 난
    : 이룰 성


    송나라의 대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주문공문집()》권학문()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이로학난성(;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일촌광음불가경(;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미각지당춘초몽(;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계전오엽이추성(;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학문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학문을 열심히 익히라는 권고의 시구로서 배움에도 때가 있으니 젊은 시절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네 구가 각각 독립된 명구로 되어 세월의 덧없음과 시간을 아껴 학문에 임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도연명의 ‘성년부중래 일일난재신( ;젊은 나이는 일생에 두 번 오지 않으며, 하루 동안에 아침이 두 번 오지 않는다.)’과 함께 면학을 권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 2008.08.23 | 의견 쓰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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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少年易老 學難成 (소년이노 학난성)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一寸光陰 不可輕 (일촌광음 불가경)
    한 순간의 시간이라도 가벼이 해서는 아니된다.


    未覺池塘 春草夢 (미각지당 춘초몽)
    연못가의 봄 풀은 깨지도 못했는데,


    階前梧葉 已秋聲 (계전오엽 이추성)
    뜰(섬돌) 앞의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을 알리는구나.


    출전: 宋나라 학자 주희(朱熹) <<偶成>>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오동잎을 바라보면서, 이미 백발이 된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감탄을 문구로 적은것이다. 이는 청소년들이 시간을 아끼고 학업에 전념할 것을 바라는 격려의 메세지이다.


    <주희(朱熹)>(중국 남송 [南宋] 유학자)  [朱熹, Chu Hsi, 주자]

    1130. 10. 18 중국 푸젠 성[福建省] 우계(尤溪)~1200. 4. 23 중국.
     
    생애

    주희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맡은 첫번째 관직(1151~58)은 푸젠 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곳에서 조세·감찰 업무를 개혁하고 지방에 있는 서원의 서고(書庫)와 학칙을 개선했다. 또한 그때까지 없었던 엄격한 의례와 관혼상제의 규율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동안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동(李侗)을 찾아갔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1158년 주희는 그를 다시 방문했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1세기에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동은 그 가운데 가장 유능한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동안에서 주부를 역임한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보낸 공식 서한과 당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친구·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그의 사상과 학문은 점점 깊어졌다. 예를 들면 1175년에 그는 철학자인 육구연 (陸九淵)과 유명한 철학논쟁을 벌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육구연은 내재성(內在性)의 절대가치를 강조한 반면, 주희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함께 연구·조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같은 견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4명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죽은 후에 없어진 '도'(道)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75년 그와 친구 여조겸 (呂祖謙:1137~81)은 이 4명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 〈근사록 近思錄〉을 편찬했다. 이 시기에 주희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모두 1177년에 완성되었고 그후 중국·한국·일본 등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역사에도 깊은 흥미를 보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축약과 재편집을 지휘했다 (→ 역사편찬) . 그 노력의 결과로 1172년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이 완성되어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로서 J.-A.-M. 무아리아크 드 마야가 쓴 〈중국통사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1777~85)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정부에서 실행하는 도덕적 원칙의 귀감이 되었다. 1179~81년 장시 성[江西省]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면서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그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 〈대학 大學〉 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한 주석을 달았고 평생 동안 이 주석작업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1189년에는 〈중용 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써냈다. 〈대학〉·〈중용〉이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 (四書)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정적(政敵)인 한탁주(韓胄侂)가 그의 학설과 행동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 1230년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후대에는 주희가 비판했던 것보다 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도 조정에 대한 주희의 정치적 비판과 이성적인 자세에는 귀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체계 만큼은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는데, 이같은 풍조는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 사상과 후세에 끼친 영향
    주희는 그의 철학에서 주지적인 이론, 궁리적(窮理的)인 논증, 고전(古典)의 권위를 성실히 받드는 것을 중시했는데, 특히 공자와 그의 후계자인 맹자를 존경했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무상(無象:형체가 없는 것)과 형이하학적인 유상(有象:형체가 있는 것)의 2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상은 본연(本然)의 ' '(理)로서 태극(太極)이라고도 하며 만물이 생겨나는 본체이다. 그리고 '이'가 형이하학적인 ' '(氣)와 합해져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낸다. 인간에게는 '이'가 그 본성으로 나타나는데 본질적으로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것이다. 악덕을 포함한 결함이 육체와 정신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불순한 '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불완전한 심성을 면학(勉學), 즉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격물'(格物)에 의해 제거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당시의 저명한 성리학자 육구연은 주희와 견해를 달리한다. 육구연은 자연법칙(理)과 형상(氣) 간에 차이가 없으며, 오도(悟道:省察)를 통해 인간의 부정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 내부의 원칙을 중시하는 육구연의 유심적(唯心的)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주희와 그 추종자들은 윤리적 행동의 실천과 유교 오경(五經)의 연구를 강조하는 '격물'을 중시했다. 윤리와 형이상학적 원칙의 연구에는 필수적으로 인간적인 성실성의 함양이 포함되어 있고, 또 덕화(德化)에 의해 정치를 했던 고대 성왕(聖王)의 예처럼 인정(仁政)을 펴라고 황제에게 진언하는 것도 포함된다. 주희의 이상이 후대에 와서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시대에도 널리 받아들여져 공식적인 지지를 얻었다. 저작으로는 〈사서장구집주 四書章句集注〉·〈주역본의 周易本義〉·〈서명해 西銘解〉·〈태극도설해 太極圖說解〉·〈시집전 詩集傳〉·〈초사집주 楚辭集注〉, 그밖에 후인이 편찬한 〈주문공문집 朱文公文集〉·〈주자어류 朱子語類〉 등이 있다.
    | 2008.08.23 | 의견 쓰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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