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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선 장로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박태선 장로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익명 | 2014.07.16 13:21 수정됨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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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교’ 50년의 힘(power)!<2>
    1950년대 ‘대형 부흥집회’의 주역...감람나무 해석을 둘러싼 논쟁  
     

     
    사진설명: 하루 평균 6만명이 운집해 교계를 뒤흔든 남산집회

                                                              (1955년 3월 26일~4월 5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55년, 홀연 혜성과 같이 나타나 종교계에 해일과 같은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박태선 장로, 그가 만든 ‘전도관’과 ‘신앙촌’이 시작된 지도 50년이 지난 지금, 신앙촌의 현주소는 과연 어떠한가? 그간 기성교계의 일방적인 음해성 선전으로 소문이 무성했던 신앙촌을 전격 방문,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신앙촌을 단독 취재-재조명했다. <편집자 주>

    박 장로가 국내외적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5년 서울 남산집회, 영등포 집회, 한강 백사장집회 등 전국적인 대형 집회를 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박 장로는 전도 기반을 확장해 나가면서 신자수가 100만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감람나무’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과 기존 기독교 교단과의 갈등, 그리고 언론의 무차별적인 신앙촌 때리기가 시작되자 천부교는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박태선 장로와 천부교인들은 이 같은 시련에 굴하지 않고 경기도의 소사와 덕소, 그리고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제1, 제2, 제3의 신앙촌을 세워 교세를 키워 나갔다.

    1980년대 들어 박태선 장로는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육신(肉身)으로 이 세상에 온 감람나무 하나님’임을 발표하면서 교명을 천부교로 개칭했다. 그는 1990년 2월 7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 사실을 천부교인들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가 이 땅에서 할 일을 다 하시고 육신을 벗고 지금은 낙원에 계신다.’고 표현했다.
     
    ‘천부교 50주년’...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사진설명: 광주공원집회(1955년 11월 25일~12월 1일)시 뽀얗게 내리는 이슬성신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천부교는 박태선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쇠락(衰落)하고 말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박태선 장로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 전파와 경제 활동을 펼치며 국내외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현재 신앙촌에서는 50년 전통의 간장, 두부, 의류, 침구류 등에서부터 최근 출시된 요구르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지난 반세기 동안 정직하고 우수한 제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온 신앙촌 기업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천부교가 창설되고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성교단의 질시는 해소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천부교 교인들은, 성경(이사야서 41장)에 ‘동방’, ‘땅 끝’, ‘땅 모퉁이’로 묘사된 곳이 바로 한국이며 이곳에 감람나무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기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육신을 입고 온 하나님’과 ‘이슬성신’, ‘자유율법’ 등의 신앙 체계로 교세 확장에 나서고 있는 천부교의 교리는 앞으로 기존 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50년 구원의 길을 찾아서"
    창교(創敎) 직후 박 장로의 ‘1, 2차 투옥’ 시련....종교적 박해와 탄압
     

    창교 직후부터 기성교단으로부터 질시와 경계의 시선을 받아 왔던 천부교. 세계 종교 운동사상 천부교의 신앙 운동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현상은 없었을 것이다. 천부교 교인들이 구원의 종교로 믿어 의심치 않는 천부교를 기성교단에서는 이단이라고 주장해 왔고 언론에서도 이에 동조하여 한때 지면을 총동원하여 천부교에 대한 왜곡 보도에 가세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학적으로도 한 번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그렇게도 핍박을 받으면서 몰려왔는지, 또 기성교단과 언론이 왜 그렇게도 극렬하게 천부교를 반대해 왔는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거든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KOTRA에 입사했을 무렵 천부교를 믿기 시작하여 일생을 천부교 전도에 헌신해 왔다는 김동훈 관장(67, 한국 천부교 워싱턴교회)의 말이다.

    1955년에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의 엄청난 수가 박 장로의 천막집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기성교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몇만 명씩을 수용할 수 있는 옥내 집회장이 없었기 때문에 넓은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데 천막 자재를 싣고 이동하는 트럭이 100여 대에 달했다고 한다.

    ‘천막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순히 병 고침을 받은 것 이외에 이슬같이 내리는 무엇을 보았고 죄가 타는 냄새와 성신의 향취를 코로 맡았다.”고 증언했다. 연세대학교 1학년 때 고질적인 축농증으로 학교까지 휴학했었다는 윤재춘(72)씨는 “저도 한강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천막집회에서는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지만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모두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고 즐거워했습니다.” 라고 당시 체험을 말한다.

    당시 집회에 참석했던 대다수의 천부교인들은 “그 당시 한국의 기성교인 중에 한 번이라도 천막집회에 참석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기성교회의 목사들도 마찬가지였다.”면서 “그때 기성교회 목사의 대부분인 2000여 명이 박태선 장로에게 안찰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박 장로의 천막집회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N.C.C.)는 박태선 장로의 새로운 신앙운동이 ‘사이비’ 종교운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1956년 3월 15일 경기노회에서도 박태선 장로를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제41회 총회(1956. 9.)에서도 박 장로를 집단적으로 성토하고 이단으로 규정해 버렸다. 기성교회의 결사적인 핍박과 언론의 왜곡 보도가 본격화되자 박 장로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단 80명이 남아서 원효로에 있는 박 장로 자택에서 ‘전도관’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또 다시 구름같이 몰려왔다. “기성교회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여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으나 성신의 역사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퍼져 가고 있었다. 몇십 명이 모여 원효로 전도관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안 되어 전국적으로 수백 곳의 전도관이 세워지고 신자들은 수십 만 명으로 늘어났다. 원효로 전도관은 더 이상 밀려드는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천부교 50년사 자료 중에서>

    1957년 박 장로는 ‘당시 국내 최대라고 할 만한 서울중앙전도관, 속칭 2만 제단이라는 교회를 마포구 청암동에 세우고 불과 몇 달 뒤 그 유명한 소사신앙촌을 건설함으로써 기독교계와 목사들을 경악케 했다.
     
     

     

    강신옥 변호사 "법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큰 잘못"
     

    모두가 이단이라고 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박 장로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촌을 건설하며 기세를 올릴 뿐 아니라, 1958년 노구산 집회라는 대부흥 집회에 연인원 70만이라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인파가 운집하게 되자, 종교계와 정치계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신앙촌을 심각한 위협의 대상으로 느끼게 되었다. 자유당 정권, 민주당 정권과 기성교회는 합세하여 1958년도와 1961년 두 차례에 걸쳐 박 장로 구속이라는 행동으로 나서게 된다.

    천부교측은 “당시 집권당 실세였던 박 마리아를 중심으로 언론을 동원해 생명물과 성화를 가짜로 몰고, 감람나무 증거를 트집잡아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집회를 열게 해 주면 이슬은혜가 사진에 찍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셨지만, 재판부는 성화 실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또 장면 정권은 하나님을 3?15 부정 선거에 터무니없이 연루시켜 옥고를 치르게 했다. 3?15 선거 당시에도 자유당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수감된 상태였는데 그 정권을 위해 부정 선거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운 것 자체가 사전에 각본에 짜인 재판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원로 법조인 강신옥 변호사도 “법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큰 잘못으로 박 장로 구속 사건은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사의 한 페이지였다.”고 당시의 사법부를 비판했다.

    구속과 핍박의 혹독한 시련이 박 장로의 바쁜 발길을 붙잡기는 했어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 것을 보고 사상계(思想界)사 장준하 사장은 “자유당, 민주당 정권에 짓밟히고, 지도자가 두 번이나 투옥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더욱 뻗어나가는 이 운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2008.10.17 09:07 수정됨 | 신고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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