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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1:8]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 소돔? 애굽?

[계11:7-8]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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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게 자기 길을 가며 예언하던 두증인이 

짐승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는 큰 성길에 있게 되는데 

그 성이 예수께서 못박힌 곳, 영적으로 소돔 또는 애굽이라 하네요. 


그렇다면 여기서 소돔 애굽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열두보석 | 2012.04.07 22:36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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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답변

답변
  • 소돔은 그곳 사람들의 죄악으로, 에굽 즉 이집트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로 큰 벌을 받았죠. 즉 하느님을 거역하는 곳이며 그로 인해 벌을 받게 될 곳이죠.

    2012.04.08 00:47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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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적 소돔과 고모라ㅣㅣ할때..영은 하느님의 권위를 옹호하는 정신적 경향이 결여된 정신상태를 말합니다.
    2012.04.08 02:03 | 신고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라고 했으므로 그 성은 "예루살렘"일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소돔" 은 환락과 사치로 방탕한 곳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은 성도들을 박해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곳 이라는 의미입니다.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2012.04.08 13:39 | 신고
  • 요한계시록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여기 상징적인 두곳 소돔과 애굽을 일컷고 그곳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했네요

    소돔은 타락과 죄악이 무성함을 의미를 하고

    애굽은 주의 백성들을 붙잡아 놔주지 않앗던 특징입니다

    주께서는 이런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것을 의미를 하네요

    2012.04.08 14:4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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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판 소돔과 애굽 이곳이 아닐까요??

    http://blog.daum.net/z321z/8555629

    2012.04.08 15:19 | 신고
  •  

    예수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를 두고 로마의 재판을 받았다합니다 이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의 이름으로 판결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두 증인이 온 천하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하며 그곳은 [계16:14] 온천하의 임금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증인을 판결하고 죽인다는 뜻입니다 

     

     

    2012.04.08 18:04 | 신고
  •    성서 시대에 기념 무덤에 매장되지 못하는 것은 끔찍스러운 모욕이었습니다. (시 79:1-3; 열왕 첫째 13:21, 22) 따라서 두 증인이 매장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는 것은 엄청난 치욕거리가 될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더운 기후에서, 길거리에 방치된 시체라면 실제로 문자적인 사흘 반이면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요한 11:39 비교) 그러므로 예언에 나와 있는 세부점은 두 증인이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수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큰 도시”의 거주자들에게 악취를 풍길 만큼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큰 도시”는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은 얼마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그곳에서 기둥에 못 박히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즉시 예루살렘이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큰 도시가 또한 소돔이라고도 불리고 이집트라고도 불린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인 예루살렘은 부정한 행실 때문에 한때 소돔이라고 불린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1:8-10. 에스겔 16:49, 53-58 비교) 또한 첫 번째 세계 강국 이집트는 때때로 현 세상 사물의 제도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사야 19:1, 19; 요엘 3:19) 따라서 이 큰 도시는,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지만 소돔처럼 부정하고 죄 많은 상태가 되고 이집트처럼 사탄의 세상 사물의 제도의 일부가 된 더럽혀진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큰 도시는 불충실한 예루살렘의 현대적 대응물로서 그리스도교국을 상징합니다. 이 조직의 신자들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던 두 증인의 전파 활동을 잠잠케 만들고서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2012.04.08 19:57 | 신고
  • 요한 계시록은 줄거리를 모르면 절대로 풀이된 말씀의 진위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본 책의 전체 줄거리를 분명히 알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거리로 이해하시게 되시거든 선별적으로 읽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만일 전체가 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이전에 어떤 한 부분을 어떻게 배워서 알고 있는데 그것을 ‘이곳에서는 어떻게 이야기 하나?’하는 관점에서 일부만을 골라 보신다면 넘어짐이 심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용은 네이버 카페 디르사에서 옮겨왔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예언을 하라 하고는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다시 말했습니다.

     

    # 다음은 이제 주신 작은 책의 내용인 판단의 ‘기준’이 되는 ‘법’을 따라 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 법을 따라 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사야서에서 본 내용은 이전 공의의 신하들 중에 남은 자들이 포로로 잡혀가 환관이 되고, 고레스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원리의 설명에 중점을 두고 있고 본 내용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결국은 이미 말씀하신 내용을 어떤 한 남겨진 자가 되는 때부터 시작해서 끝까지의 과정을 요약해서 다른 표현법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1 예언을 하라 하고는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그 지팡이를 잡고 일어나서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밝혀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의 마음을 척량하여 그 책의 말씀이 그들에게 지팡이와 막대기가 될 수 있게 하라.”

     

    # 시편에 언급된 지팡이와 막대기 중에 지팡이는 지혜이며, 막대기는 훈계를 뜻합니다. 그 성령의 법이 경고를 받은 자들을 척량하는 기준입니다.

     

    '갈대'란 자기를 부인하는 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전제로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땅에서 잘려나간 갈대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척량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중 나는 새처럼 세상에 속한 것을 탐하는 마음과 분리되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살아갈 마음의 준비가 된 자를 척량하는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되는 성령의 법 안에 있는 자들의 마음을 척량하여 그들을 바르게 하고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은 그 잣대로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 그 마당은 이방인인 그들에게 주었으므로 그들이 그 마당에서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 성전 밖 마당: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성령의 법 외의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6권의 책 이외의 것만 말하는 자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들이 그것만을 말하는 것은 성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온갖 곳에서 지혜를 구하여 말씀을 깨달으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않고 자기의 머리로만 말씀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마당에만 있는 것입니다.

     

    # 마흔 두 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중에 반 때를 뜻합니다. 마흔 두 달이면 3년 6개월인데 이 날의 숫자나 기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때”를 의미하는 수입니다. 이 이해를 위하여 먼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무엇인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12장 14절에 언급되어 있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한걸음 더 들어간 의미입니다.

     

    *************

     

    <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신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계획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제일 큰 틀인 세상을 향한 섭리의 경우에 한 때는 첫째 하늘이 있던 노아 이전의 때이며, 두 때는 모세율법의 때이고, 반 때는 성령의 법이 서서 그때가 세세토록 끝나지 않는 현재 진행형의 상태, 즉 그리스도 이후의 모든 때를 말합니다.

     

    이 삼 년 육 개월을 그렇게 말하는 단서는 요셉의 이야기에 나오는 칠 년의 흉년과 칠 년의 풍년 기간 중 이 마흔 두 달이 각각의 온전한 때를 나타내는 것의 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뿐 아니라 제시 드린 숫자의 의미로 해석을 해도 마찬가지 의미가 됩니다. 사십은 그리스도의 범위 안에서 계획된 것을 뜻하며, 두 달이란 교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 두 제자, 두 기둥, 두 증인이 ‘달’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행하는 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이렇게 되는데 이것이 그 섭리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에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예수님의 때로 국한을 하면 예수님께 있어서 한 때는 세상에 오신 때이며, 두 때는 공생애가 되며, 그 끝은 십자가에 달리고 죽으신 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때가 됩니다. 그리고 반 때는 시온산의 포도원의 소출을 기다리시는 지금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 한 때는 세상에 영이 죽은 상태에서 낳아진 때이며, 두 때는 선택을 받은 때이며, 반 때는 그 나머지 기간을 가는 때입니다. 앞의 두 경우에서 섭리와 예수님의 때는 그 반 때가 끝나는 지점을 알 수 없으나 사람의 경우에는 그 반 때가 끝나는 때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힘겨운 반 때를 가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드는 때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목적이 달성이 되는 ‘세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땅에서 하늘에서의 날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면 ‘다시 나감이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흔 두 달 동안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성령의 법"을 짓밟을 것이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중에 그 반 때 동안 성령의 법을 가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온 때가 한 때이며, 선택을 하신 때가 두 때이며, 선택을 받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때가 그들에게 정해진 반 때인데 그들이 그 반 때를 사는 동안에 마음이 세상에 속한 것을 탐하는 것으로 돌아가 사단에게 엎드려 절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매진하면서 성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성을 가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짓밟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 반 때가 차는 세 때는 성령의 법을 세우시고 그 성령의 법과 함께 활동하는 황충을 만나는 ‘다시 나감이 없는’ 것과 반대로 ‘다시 기회가 없는’ 때를 만나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이것을 말씀을 들어서 일일이 설명을 하려면 성경 전체를 들이대야 하는 논리인데 이렇게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섭리로 설명을 하면 이처럼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면 성경 전체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도 있고, 이 이해가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보면 단번에 성경 말씀의 뜻을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필자는 무지와 무식과 관계가 없다고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고 숫자의 의미를 적용하면 다니엘서의 남방과 북방에 대한 전쟁의 기록이 왜 그렇게 묘사가 되었는지, 세마포를 입은 자는 누구인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나 끝이 오는 것은 무엇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곱셈이나 나눗셈도 필요 없이 한 자릿수의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정도의 사고력만 있으면 성경은 모두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만, 성경말씀은 사람이 연구하여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을 계산 잘하는 수학자나, 암기 잘하는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나, 달변가나,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나, 환상을 보는 몽상가나, 새벽으로 밤으로 자기의 의를 가지고 행하는 사람이나, 자기의 의로 성경을 수 백 번씩 통독을 해야 갈 수 있다는 오해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위와 같은 것들을 잘하면 세상에서는 높아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높아진 자에게, 또 높음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매우 따르기 힘든 조건을 제시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낮은 데 있는 자에게, 낮음을 추구하는 자에게 짐을 덜 지게 하시는 이치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론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어떤 사람의 말씀 안이 아닌 세상에서의 상대적인 위치를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증거로 남아 있으나 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상태는 그것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좋고 싶어서 좋은 사람도 없고, 영웅으로 나고 싶어 난사람도 없으며, 부잣집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남자로 나고 싶어 난 사람도 없으며, 동성애자로 나고 싶어서 난사람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쟁하며 높아지기를 배웠고, 그것이 참인 줄 알았고, 그래서 그 참으로 여겨지는 것을 향해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 멋진 집 사드릴게요.” 한 것이며, “대통령이 되서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될게요.” 한 것이므로 그것은 먼저 산 자들이 삶의 헛됨과 인생의 존재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므로 지금 현재 처해 있는 모습을 가지고 누가 누구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똑같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똑같은 상태가 이제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기준이 없었던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기준이 서게 되었으므로 그 기준에 따르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행하는 행동 양식은 저마다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씨 중에, 자기의 주변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씨가 되는 길을 택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에 속한 것을 향한 욕구가 하나님 앞에서는 흠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것을 지우며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

     

    3 이제 나, 곧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공의, 다시 세우시는 성령의 법이 나의 두 증인에게 성령의 법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세를 줄 것이다. 그때에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할 것이다.

     

    # 두 증인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을 드렸습니다.

     

    # 굵은 베옷을 입고: 세례요한처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의 행적은 남겨진 자들의 행적이 됩니다. 결국에 목 베임을 받는, 죽음을 당하는 길로 가는 것이 징계의 기간에 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 일천 이백 육십 일: 일천이란 그리스도의 범위인 시온산에서의 계획에 온전히 따름을 표현한 것이며, 이백이란 한 사람이 씨를 뿌려 백배의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며 ‘두 증인’이 얻는 것이므로 이백이 되고, 육이란 세상에서 일하는 동안을 말하며, 십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기간을 말합니다.

     

    정리하면 이날은 “온전히 자기를 부인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에 말씀을 전하며 사는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를 묘사하고 있는 12장 6절에는 이 기간을 양육 받는 기간으로 묘사합니다.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양육의 기간이며, 세상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는 예언의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바로 선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

     

    # 감람나무란 기름, 즉 ‘신의 부음’을 받아 성령의 법을 깨닫고 성령의 법에 의한 열매를 낼 자라는 뜻이며, ‘두 촛대’ 라는 것은 세상에 빛을 비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입에서 불을 내고 그 대적하는 원수를 소멸할 것이므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 그들이 입으로 내는 불은 "성령의 법"입니다. 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말에 대하여 그릇된 것이라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그것이 즉각적인 성령의 법을 훼방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전해진 성령의 법이 그를 훼방한 자로 영적인 낙인을 찍으면서 그의 영이 영영히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것인데, 그 바른 것을 들은 자가 스스로 그릇됨이 보이므로 그것을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해를 입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자기를 스스로 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공의를 세우시는 원리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공의가 사라졌으므로 인생을 위하여 그 공의를 다시 세우시고자 그리스도를 죽이는 고통을 감내하며 세우신 것이며, 택한 자들을 고난 가운데 넣으시며 그 공의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것이 그들에게는 자신의 악을 들추는 것이 되어 들춤을 받은 자 중에 인정하는 자는 돌이켜 선한 길을 가는 것이고, 인정하기 싫은 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찌르고 죽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깨닫고 자기 마음을 섞지 말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 곧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입니다.

     

    6 그들이 말씀의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고 그가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말씀의 권세를 가지고 이전 공의하의 물이 피인 것을 증명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 즉 이전 공의를 관장하던 자들을 칠 것이다.

     

    # 독자는 성령의 법이 어떤 것인지는 이제 알았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잠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정작 법령이 전개되어 있는 10장 이후의 말씀들은 아무리 곱씹어도 그 뜻을 알 수가 없고 설령 ‘알았다’ 하고 그 안 것을 말하면 말하는 순간 틀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것인지는 지금 제가 한 말을 잘 생각해보면 알 수도 있습니다. 필자의 말은 성령의 법이 아니므로 인생들이 하는 철학적 사고를 해보면 왜 이렇게 말을 하는지 추측은 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늘을 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포를 하게 하시기 전에 성령의 법은 닫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게 되므로 비가 못 오는 것이며, 이전 공의하에 마시던 물이 모두 피라는 것만 확인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말씀의 자체적인 증거들로 인하여 잠언의 말씀이 성령의 법이 분명하기는 한데 이전 공의는 그것을 모르고 한 말들 뿐이니 그것이 다 먹지 못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므로 그것은 마셔서는 안 되는 피라는 사실만 깨닫는 것입니다.

     

    # 여러 가지 재앙이란 출애굽기에 기록된 바로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들입니다. 끝내 성령의 법을 받지 않으면 결국엔 그 열 가지 재앙을 모두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 공의의 관장자이면서 돌이키지 않는 자는 그 재앙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게 됩니다.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하게 됩니다. 지금 계시록에서 ‘여러 재앙’ 이라고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일 뿐입니다. 바로 왕과 같은 짓을 하는 미련함을 스스로 행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들은 단지 그 마음에 저 사람에게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면 받을 지도 모르겠다는 나름의 선한 목적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나 그것을 받지 못하는 자는 그 목적에 관계된 반대급부를 재앙으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고 애써 전하는 것이므로 그 마음에는 그가 재앙을 당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으며 또 보셨듯이 절대로 사심을 섞지 못하게 규칙을 말씀하고 계시므로 그가 저주나 재앙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자체가 양날이 선 검이므로 이리 베어서 안 베어지면 저리 베이게 되는 원리입니다.

     

    7 그들이 그 증거를 마치는 때가 되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 증거를 마칠 때에: 복음서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아니한 때입니다. 전함을 다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정해진 기한이 되어서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곧 온전한 자기의 부인입니다. 씨 중에 가장 작은 씨가 되어 모든 사람과 격절되고 사람들에게 잊혀 지는 것입니다.

     

    # 전쟁을 일으키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 앞서 말한 황충이 아닙니다. 그 황충이 활동을 하는 성령의 법을 받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이킨 자입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던 가롯유다와 같은 자입니다. 사단이 세우는 그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모으신 자들을 위하여, 그들을 강하게 연단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이기는 과정의 하나로 이 짐승을 사용하십니다.

     

    이 죽음은 짐승에게 죽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주는 고난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본 절의 짐승처럼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원을 따라 스스로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것으로 끝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 고 하셨지 내가 지고 갔으니 너희는 안 져도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과연 지금 이 세대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성령의 법도 모르는데 어찌 자기 십자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모르고 그 기준에 의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모르는데 어찌 악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하면 “저걸 어떻게 매장시켜버리나.” 하고 궁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로 자기 십자가가 생겨나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것은 악합니다.”, “ 높음을 추구하지 말고 낮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면 높은 자들이 미워는 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가진 자들이 미워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악하다 하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나를 미워하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의 가진 것이 모두 악이라고 말씀이 증명한 자들이 자기들의 가진 것이 더러운 것이 되는 것이 싫으므로 자기가 쌓은 악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예수님의 어깨에 지우고 죽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십자가를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내게 지우게 하고 나를 멸시와 조롱을 하게 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선을 행하는 것만으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은 예수님처럼 고통을 당하며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안식을 얻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모든 택함을 받아 돌이키는 자는 자기가 속하여 있는 영적 사회 속에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이전 공의를 관장하던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이 지워주는 십자가를 지고, 그 짐승들에게 내침을 당하면 그것이 다음절에 말씀하시는 ‘십자가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8 그때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을 것인데 그들이 죽은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한다. 그곳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다.

     

    # 큰 성 길이란 이전 공의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죽는 것이 거룩한 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9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인하는 자들과 야곱 족속이라 말하는 자들과, 성경을 해석한다 하는 자들과,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섰다고,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 그 시체가 있을 것이며 영이 살았다고 자인하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 삼일 반: 선택을 받은 자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중에 그 반 때에 속하는 기간 동안만을 말합니다. 그 반 때가 지나면 성령의 법이 서고 그들이 하늘 곧 성령의 법에 속한 자들이었음이 하나님에 의하여 드러나면서 마음에 세상에 속한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며 시편의 말씀과 같이 땅에서 하늘에서의 날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장사하지 못하게 한다: “저 자들을 잊지 말고 교훈을 삼아 다시는 저와 같은 사이비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10 이 두 선지자가 이전 공의에 거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낼 것이다.

     

    # 성령의 법을 전하는 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선지자인 것입니다.

     

    # 땅에 거하는 자들: 흙으로 돌아갈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예물을 보낸다는 것은 서로 그간의 수고를 격려한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가 됩니다.

     

    # 하나님의 법은 사람이 납득할 수 없게 실행되지 않습니다. 이성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며, 그 이성과 사고력으로 이해하도록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재판도 그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들이 발로 일어설 것이며, 그로 인하여 그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 이 생기가 바로 두 증인이 그동안 뿌린 말씀을 받은 자들의 마음에서 싹이 나는 것입니다. 그 싹이 나는 사람들이 13절의 남은 자들입니다. 발로 일어선다는 것은 그들이 바른 것을 전한 것임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자들은 그들을 십자가에 다는 데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중략-

    2012.04.08 21:50 | 신고
  •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

    아브람과 롯의 선택.

    눈을 들어보니  롯이 선택한 곳이 물이 넉넉하고 에덴동산을 멸하기 전의 풍요로운 땅.

    롯은 그 풍요로운 땅을 선택했고  롯이 선택하고 남은 곳[=거친땅, 광야]를 아브람이 선택하였다.

    견물생심이라고..

    눈에 좋은 것이 들어오면 사죽을 쓰지 못하고 바로 정과 욕심의 땅으로 끌려가는 영적인 롯들.

    한편으로는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것,권력,물질 앞에서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뭐고 다 접고

    세상의 것을 먼저 취하는 자들.

    속사람의 영으로 예수님은 와 계시는데..마귀권세인 세상의 것[=정과 욕심, 죄]의을 취하니

    이렇게 취한 자들의 마음심보가 죄인의 상태.

    지금도 이렇게 정과 욕심의 주시옵소서 기복교인들 속사람[=소돔과 고모라]에서 예수는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40년동안 교회다녀도 예수는 역사적으로 해골언덕[=골고다]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줄 알지만 영적으론 소돔과 고모라의 땅인 기복의 땅, 탐심의 땅., 죄의 땅 [=우리들의 죄인된 땅들]

    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죽으셨으니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가 탐심이 죄인줄 알때

    이제는 죄로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릴때 예수님의 바지가랑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부활할것이 아닌가>?

     

    주시옵소서로 가는 기독교, 불교 모두가 소돔과 고모라성이요 바벨론성전인 것이다.

    "거룩한 성전에 가증한 것이 들어섰거든" -- 이미 주시옵소서라는 하는 마음상태가 가증한 것.

    2012.04.09 08:03 | 신고
  • 소돔 애굽을 알려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자들이 누구인지 알면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즉 소돔과 애굽은 종교인들이 장악하고 있고 그들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말하며 현제 모든 개신교에서 가장 우월 하다고 자신하는 곳이 소돔 애굽일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 권세란? 영적인 신앙인들의 세력을 말합니다.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초림때 의 소돔 고모라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 받은 현 개신교의 모든 종교 세계야 말로 영적 소돔 고모라 성이 아닐까요?

    2012.04.09 10:0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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