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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시오백년 도읍지필마러?

정몽주 시오백년 도읍지필마러?

모바일 고기장사 | 2017.11.15 09:57 | 조회 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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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드니/山川(산천)은

    依舊(의구)imagefont되 人傑(인걸)은 간듸업다/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imagefont이런가 imagefont노라.


    회고가(懷古歌)는 조선 초기에 길재(吉再)가 지은 시조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1270&cid=46642&categoryId=46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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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5 수정됨 최초등록일 2017-11-15 10:01
    최종수정일 2017-11-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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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는 단심가이며 오백년도읍지를은 길제의 시조 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작자: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 무렵에 고려말 충신들에 의해서

    불려졌던 시조는 회고가라고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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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5 | 의견 쓰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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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는 단심가이고

    오백년 도읍지~~는 야은 길재선쟁의 시조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seol&logNo=30125537250

    | 2017.11.15 수정됨 최초등록일 2017-11-15 10:09
    최종수정일 2017-11-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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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은 길재가 지은 고시조 입니다


    정몽주 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마는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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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재 고려충신 조선 선비의 스승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인물. 그다음 정몽주. 이두명을 일러 양은이라고 함. 고려삼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음. 이두명을 양은이라 하여 각별히 대우함. 자손들은 과거시험 없이 등용 사당세우고 예배함. 조선유학의 도통도 이분들로부터 시작하고. 조선의 모든선비는 길재선생의 제자임. 세종때 상강행실도 충신편 뽑힌 유일한 선비가 길재고 세종이 정몽주를 추가하여 두명이 충신으로 올라갔음. 길재가 독보였고 정몽주는 꼽사리 낀 상황임. 이만큼 길재의 영향이 무지막지했음.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의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 이말의 근원이 길재에서 나온말임. 소학을 기본으로 하라 효제 충신 예의 염치를 정신으로 삼아라 이것도 길재의 가르침임. 조선시대때 길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것 이상으로 엄청난 대우를 받았음. 남명조식 퇴계 이황 류성용 이순신 송시열 이이 등 어떤 학자도 길재와 비교를 할 수 없었음. 조선시대때 선비중 탑이었다고 보면 됨. 그다음 정몽주 선조 이후 정몽주가 조광조에 의해 도통의 시작으로 충신으로 추앙하면서 정몽주가 서서히 길재와 견주게 되고 위작 단심가에 의해서 지금까지 온것임. 조광조 이후 정몽주가 조금씩 앞서나가는 형세가 된것임. 결정적인건 단심가고. 하지만 이건 위작이고 선조 이후때 일임. 그전엔 길재가 탑이었음. 그래서 세종때 고려충신에 유일하게 추천된것이고. 우의정 맹사성이 주관하고 부제학 설순이 집현전 학자와 4년간 자료모아서 한 것이니까. 국가적으로 처음으로 대대적 작업에 의해 뽑았던 고려충신은 단한명 길재임. 성종이후 어쩌구 다 뻥임. 태종이방원때부터 대우를 받았음 그의 아들도 무과거로 등용됬음. 제자들도 엄청 과거 장원으로 합격했고 장원에 늘 선산출신이 경쟁했다. 할정도로 길재의 제자들은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조선통신사 최초로 간 사람이 길재의 수제자임. 정종때 과거 장원급제했다고 함.

    | 2017.11.20 수정됨 최초등록일 2017-11-20 03:06
    최종수정일 2017-11-20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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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재와 정몽주 평가 조선왕조 실록 전체를 살펴본 결과 정종때 권력을 잡은 이방원이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는게 좀 께림직했는지 권근이 주청하여 정몽주를 충신으로 길재를 모든 선비가 따라 배울 사표로 추천함. 이게 모든 평가의 시초가 됨. 하지만 세종때 삼강행실도 그중 충신에 고려충신으로 누굴세울까 하는 것인데 맹사성과 집현전 학자들은 유일하게 길재만 추천하자. 세종은 위 사실을 알고 있던터라 아버지때 정몽주가 충신이라 하지 않았는냐 하며 정몽주를 추가하라 하였고 이에 길재 정몽주가 올라감. 여기부터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가 교과서나 마찬가진 삼강행실도에 올라가므로 완벽하게 독보적인 집안이 된것임. 하지만 길재는 추가하여 제자들이 때로 조정에 등용되므로 길재의 제자는 단연 길재를 더욱더 높이 추존하였음. 정몽주보다 길재를 더 높이 친것이고.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하였는데 조광조에 의해 정몽주가 도통의 시작이라 하면서 정몽주를 더 높이 떠 받듬. 조광조 집 근처에 정몽주묘 가 발견됐다고함. 하필 그때 자기집 주변에서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함. 도통도 그렇다더라 기대승이 그랬다더라. 어쩌구 이것도 좀 이상함. 당시 길재의 제자 김숙자 김종직 이맹전 하위지등 선산 사람들은 전혀 이런 말을 한적이 없어서. 다 야은선생의 가르침이라고 했지 정몽주 말은 단 한마디 안나옴. 소학을 기본으로 하라는것도 소학동자 김굉필도 다 야은의 학풍이라고 했지 어디에도 정몽주 학풍이란 말이 없음. 이상하게 조광조가 자기 고향땅에 정몽주 묘가 발견됐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게됨. 이건 뭔가 좀 수상하지만 그리고 정몽주를 문묘종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40년을 싸우다 지친 왕실은 광해군때 그래라 하고 인정해줌. 그리고 심광세 단심가를 마치 정몽주가 지은것처럼 둘러침.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가 다 아는대로고.

    | 2017.11.20 | 의견 쓰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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