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A

질문

질문

발췌개헌하고 사사오입 사건이 뭔지 쉽게 알려주세요 ㅜㅜ

매칭된 토픽 한국 현대사 2018.08.10 신고
프로필 사진

익명의 질문입니다.

답변

답변 목록
  • 답변

    拔萃改憲 :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골자 + 내각제 가미 발췌 개헌안 제출 → 경찰 포위 속에서 국회 기립 표결로 통과시킴 → 1952년 발췌 개헌안을 토대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권 유지

    1952년 7월 4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개정되고, 같은 달 7일에 공포된 제1차 개헌, 부산정치파동


    1952년 1월 18일 정부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부결되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과 반민의 국회의원 소환이 가능함을 주장하고 관제데모를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협박했다. 국회는 내각책임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을 제출했고, 정부측도 개헌안을 국회에 다시 제출하여 정면 대결했다.


    5월 10일 종료된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여당과 여당계 단체들은 반(反)국회세력을 형성해 연일 국회해산과 국회의원 소환 등을 요구하는 땃벌떼·백골단·민족자결단 등 폭력단체의 관제 데모를 일으켰다. 정부는 같은 달 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및 전라남북도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 12명을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28일 국회는 계엄령의 즉각 해제와 구금의원의 전원석방 요청을 결의했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미국 대통령 H. S. 트루먼이 국제연합(UN)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원조하고 있다는 함축성있는 비난을 하는 등 비난여론이 쇄도하자, 정부는 국회해산을 일단 보류했으나 사태는 장기화되었다.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이 중재 역할에 나서 각파 대표와 회담한 끝에 정부안을 골간으로 하고 국회에 국무위원 불신임권을 부여한다는 국회안을 보충하여 소위 발췌개헌안을 만들어냈다. 7월 4일 국회의원들은 의사당 내에서 경찰들에 포위된 채 기립투표 방식으로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


    사사오입 개헌 : 1954년 11월 초대 대통령에 한해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 출마할 수 있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 →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부결 → 수학적 논리로 개헌안 통과로 뒤집힘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은 원내 압도적 다수(203석 가운데 114석)를 차지했지만, 당초 목표였던 개헌정족수 136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자유당 소속의원과 무소속의원 136명의 서명으로 9월 8일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의 주요내용을 보면 국민투표제 가미, 내각 책임제적 요소의 전면적 삭제에 의한 순수한 대통령 책임제,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승계제도,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제한 철폐, 일부 통제적인 경제조항의 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로의 수정 등이었다. 이 개헌안이 통과되기까지 연 9일간 국회의사당 앞은 방청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여야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뉴델리 사건'을 조작, 민주국민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11월 27일 국회표결 결과 재적 203명 가운데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이틀 후인 29일 사사오입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프로필 사진
    미쌤 한국 현대사 전문가

    역사교육을 전공하고 미래 교사를 꿈꾸고 있습니다.

    총 획득메달 동메달6
    추천
    추천 0
  • 답변

    https://namu.wiki/w/%EB%B0%9C%EC%B7%8C%20%EA%B0%9C%ED%97%8C?from=%EB%B0%9C%EC%B7%8C%EA%B0%9C%ED%97%8C


    1. 개요[편집]

    拔萃改憲
    1952년 7월 2일 6.25 전쟁이 한창인 도중 임시수도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그리고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번째 친위 쿠데타.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당과 야당의 각 안 중 좋은 것을 발췌하여 절충한 개헌이라는 뜻. 그러나 실상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며, 헌법을 위반한 개헌이었다.



    https://namu.wiki/w/%EC%82%AC%EC%82%AC%EC%98%A4%EC%9E%85%20%EA%B0%9C%ED%97%8C


    1. 개요[편집]


    자유당이 저지른 한국 정치사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 행위
    2차 개헌
    1954년 11월에 실행된 헌법 개정. 대한민국의 역대 개헌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이 경우도 대통령의 연임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사오입(四捨五入)은 수학용어로 반올림의 여러 종류 중 하나다. 자세한 것은 반올림 문서 참조.

    2. 배경[편집]

    6.25 전쟁 도중에 치러진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법을 개정한 이승만 대통령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원래 2회까지만 가능했던 대통령 연임 제한[1]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폐지하려고 한 개헌이다. 헌법의 정규 조항이 아닌 부칙에 "이 헌법 개정 시행 당시의 대통령은 연임 제한 조항의 적용을 안 받는다"라고 끼워 넣는 것이었다. 일종의 수정헌법.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애초에 연임 제한을 따온 미국 헌법에는 처음에는 이 제한이 없었다. 즉 워싱턴 때부터 원래는 헌법상 무제한 연임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높은 당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워싱턴 본인은 3선을 거부하고 스스로 물러났고, 이후에도 이후 재선까지 하고 물러나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된 것이다. 국부도 안한 3선을 누가 감히? 현재의 미국 헌법상 연임 제한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4선까지 한 이후에야 명문화된 것이다. 결국 워싱턴 한 명의 결단이 200년 가까이 미국의 3선 이상 연임을, 나아가서는 미국의 독재자 출현 가능성을 틀어막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에 나타난 독재정권들을 생각해 보면...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사건 이상의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이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1954년 5월 20일 시행되는 민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대해 찬동 혹은 추진한다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하여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 136석에 크게 못미치는 114석 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에 자유당은 매수, 협박, 회유 등 이 수단 저 수단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어찌어찌 잠정적으로 137석의 찬성자를 확보하고 예의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 개헌안을 상정했다. 그런데...

    3. 부결, 그리고 사사오입[편집]

    1954년 11월 27일 개헌 투표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무효 1명.
    즉, 개헌 정족수이자 재적의원 2/3인 135.333···명에 불과 0.333···명이 모자라 부결이 선포된 것이다. 최소 2표 이상의 반란표 혹은 무효표가 나왔던 것. 개헌을 저지하고자 했던 민주당은 만세를 부르고 자유당은 좌절했다. 개헌 저지측을 지지하는 언론은 민주주의 승리라는 기사를 내며 자축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해서 개헌안 부결에 따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부린다.

    203의 수학적 2/3는 135.333···인데 0.333···은 0.5 미만으로서 수학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는 135.333···명이 아니라 135명이다.

    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2]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개헌안 투표 다음날 조용순 법무부 장관은 0.333···이라는 숫자는 독립된 주체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사오입의 논리로 버림하고, 135표만으로도 개헌선인 정족수 2/3에 도달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를 위해 인하공과대학의 학장, 서울대학교 현직 수학 교수어용교수까지 대동하며[3][4]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개헌 정족수가 135.333···이 아닌 135이라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논리를 11월 29일 본의회에서 억지로 가결되면서 결국 개헌이 선포되었다. 당연하지만 가결 직후 이철승 의원이 의장석으로 뛰어들어 최순주의 멱살을 잡는 등 국회 공성전이 발생했다.

    4. 반응 및 영향[편집]

    언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자유당의 행위를 깠다. 때문에 이 사건 이후 도시민, 특히 서울시민들은 이 유치한 행동을 보고 사람들끼리 모이면 "야, 그거 사사오입해버려!"하며 이승만과 자유당을 비꼬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15살도 사사오입 하면 20살이니 어른으로 인정해야 한다"라는 드립도 가능하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도 "임신 다섯달이면 사사오입이므로 한 명으로 쳐야 하니 낳아야 한다"라며 송강호가 그 말을 믿고 자기 아내에게 임신 5개월째니 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다그치는 장면을 넣어 당시 정치 상황을 비꼬는 대목이 있다. 여담으로 송강호는 나중에 청와대 이발사가 된 후에 박정희에게 이 얘기를 농담삼아 하다가 박정희가 "배운 놈들이 나라를 망친다니까!"라고 역정을 내는 바람에 오히려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고 그 날 밤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죄로 총살되는 꿈을 꾼다.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을 통하여 이걸 통렬하게 깠다. 절룩거리면서 가는 야당 의원을 보고 "아니? 어쩌다가 그리 다쳤습니까?"라고 말하는 고바우 영감에게 의원은 "푸른 제복을 입은 개에게 물렸다오."라고 대답했다. 이건 당시 이 억지스러운 결정에 따졌다가 동원된 경찰에게 강제 해산 당한 것을 풍자한 것이였다. 그리고 불구속 입건과 같이 벌금형을 당했다. 
    김영삼민관식 등 자유당 소장파 국회의원 일부는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하며 자유당을 탈당했다.

    5. 트리비아[편집]

    여담으로 딱 한 표가 모자라게 된 원인은 여당 국회의원 중 한 명이 문맹이라서 한자를 전혀 못 읽었던 탓에[5] 어느 쪽이 가(可)고 어느 쪽이 부(否)인지 헷갈렸는데, 자유당 원내부총무단에서 문제의 의원에게 '네모꼴이 있는 글자 밑에 찍으라'고 했는데 문제는 그 네모꼴이 가(可)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否)에도 있었던 것.[6] 결국 그 의원은 양쪽 모두 찍었다.[7] 투표 결과에서 무효표 1표가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때문에 이 사건 이후 개헌 관련 투표는 기명으로 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교사들 중 국사 전공이 아닌 교사들이 사사오입 사건을 득표수를 반올림하여 조작한 사건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8] 다시 한 번 더 짧게 정리하자면, 사사오입으로 득표 수를 바꾼 것이 아니라, 가결에 필요한 인원 수를 바꾼 것이다. 개표를 하고 보니 가결에 필요한 득표 수가 딱 한 명 모자라기에 가결 커트라인을 소수점부터 반올림해서 '사실 한 명 더 없어도 가결임!'이라고 우긴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사건은 당시에는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민의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9]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게 된 사건 중 하나였다. 김영삼은 이승만이 비판받을 점이 많긴 하나, 어찌되었든 정부 수립이라는 국부 비스무리한 역할을 했으니 일단 그것은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이런 모습으로 인해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주의에 어긋나고 독재로 치달았다는 걸 비판하며 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프로필 사진
    Khrome 한국 현대사 전문가

    총 획득메달 은메달2 동메달28
    추천
    추천 0
  • 답변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은 모두 이승만 대통령 당시에 있었던 개헌인데요 발췌개헌은 1952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있던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한 개헌으로 이 개헌에서 대통령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게 됩니다. 사사오입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하여 헌법을 고치게 되는 2차 개헌이 되겠습니다


    발췌개헌 --- 1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 2차 개헌



    발췌개헌의 경위


    1950년, 5·30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1951년 11월 30일,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에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官製民意)'를 동원하여 국회 의원을 위협하는 한편, 5월 25일에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5월 26일,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는 한편,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연행(정헌주(鄭憲柱), 이석기, 서범석, 임흥순, 곽상훈, 권중돈 등 12명은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는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2018.08.11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프로필 사진
    남남수 한국 현대사 전문가

    다양한 정보를 다루는 칼럼리스트입니다

    총 획득메달 금메달1 은메달6 동메달10
    추천
    추천 0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