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A

질문

질문
"차원부 설원기"는 과연 위조된 역사서인가?

류씨와 차씨는 동원분성이 확실히 아닌가?

동원분성이 아니라면 이에 합당한 증거자료들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매칭된 토픽 역사/역사학 2014.04.27 수정됨 최초등록일 2009.01.14 02:50
최종수정일 2014.04.2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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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임이 학계에서도 밝혀졌습니다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목차
    1. "차원부설원기" 문제 이수건 선생의 논문: "차원부설원기"는 위서(僞書)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관련 맺음말


    1. "차원부설원기" 문제

    문화류씨의 현안 문제 중 하나에 "류차문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안차씨 문중에서 문화류씨의 시조인 류차달(柳車達)을 원래 성이 차(車)씨이고 이름이 해(海)였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자신들의 족보에까지 올린 사건입니다. 이것은 문화류씨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모독입니다. [이 글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존칭을 생략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문화류씨들이 어느 정도는 그런 억지 주장에 일조해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대략 17세기 후반의 족보부터 류씨와 차씨가 근원이 같다는 주장을 싣기 시작했고 문중에 관심을 가진 문화류씨 어른들은 모두들 그렇게 믿고, 게다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곧 류차달의 몇 대 위의 조상까지 차씨였고, 그 중 어떤 차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피신해서 류씨로 성을 갈았고 그 몇 대 아래의 후손이 류차달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에는 또 차씨가 신라의 명문이었고, 또 그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설적인 중국의 제왕인 황제(黃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주장에 따르면 차씨뿐만 아니라 류씨들이 중국의 황족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을 숭상하는 모화사상에 절어 살았던 조선 후기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이 그냥 말로만 나온 것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화류씨 족보에는 몇 가지 문헌들이 언급이 되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전쯤에 세상에 등장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중 다른 것들은 지금 전혀 남아 있지도 않고, 족보 속에 그것들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도 믿기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 대략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내용에 조선의 여러 왕이 등장하며, 사육신의 일부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등장하는 일견 탄탄한 역사적 사료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이 책은 '차원부'라는 사람이 중심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고려말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설원기는 차원부가 이성계와 가까웠고 그에게 음으로 큰 영향을 미쳐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사람 특히 하륜에게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설원이란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뜻인데, 차원부설원기는 차원부가 바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거룩한 인물이면서 조선 건국에도 큰 공을 세운 사람인데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그것을 풀어달라고 여러 신하들이 선대의 여러 왕들에게 청원해 왔음을 밝히며, 어떤 왕에게 그를 설원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차원부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설원기의 도입 부분에 차원부의 시조가 류차달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차원부가 대단한 가문의 후손이라 주장합니다. 그리고 설원기의 부록에서는 류차달의 조상이 차씨였다는 내력이 (본문은 아니고 주석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의 영향은 대단해서 문화류씨와 연안차씨들이, 그 책의 외면적 권위를 큰 배경으로 해서, 그곳에 나온 내용과 임진왜란 전에 나온 다른 요상한 사료들의 내용들을 혼합해서 중국의 황제로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완전하게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가문사의 정사(正史)로 삼아왔으며, 심지어는, 그런 내용에 왕씨들도 등장하는데, 고려 왕족으로 자부하는 왕씨들조차 관련 부분을 자신들의 가문사의 기술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후 "증보문헌비고" 같은 조선의 국가적 자료들에게까지 이런 내용이 사실인양 기록되었으며, 당연히 모든 성씨 관련 자료들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차류종친회'가 생겨났으며, 심지어는 근년에 차씨들이 문화류씨의 조상인 류차달을 차씨라 주장하고 나서게까지 된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기록들에서도 류차달이 차씨로 기록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설원기에서조차 그냥 '류차달'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문과 문헌의 해석을 엉망으로 해서 말도 안 되는 견강부회를 한 것인데, 이것만 해도 류차달이 '차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나아가서, 이하에서 자세히 기록하겠지만, 류씨와 차씨는 애당초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차원부설원기"는 조금만 들여다봐도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 그런 책입니다. 주 저자가 박팽년이라 하고,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 하위지라고 하는데, 본(本)에 따라서는 (옛날 책들은 대개 여러 본이 존재함) 서문을 쓴 사람이 하위지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왕명을 받아서 썼다고 나오는데 그 쓴 날짜가 박팽년, 하위지 등이 사육신 사건으로 죽음을 당하기 불과 며칠 전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왕명을 내린 왕이 바로 세조가 되어야 하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세조일 수가 없는 구절들이 튀어나오고 거기 등장하는 얘기들이 거의 다른 얘기들을 적절히 끌어다가 변형해서 넣은 것들이거나 근거가 없는 것들이며, 부록에는 시(詩)들이 붙어있는데, 연대를 따져보면 도무지 불가능한 경우도 여럿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이예장은 이미 죽었을 때, 그리고 남효온은 2살 때 시를 지은 것으로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류차달의 조상이 차씨였다는 주장은 이 이예장이 썼다는 시에 암시가 되어 있고 또 그가 직접 달았다는 주석에 상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모두 죽은 사람 곧 유령이 쓴 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명백히 사육신 사건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저자들을 사육신으로 조작하려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육신은 나름대로 충절을 지킨 만고의 충신들인데다가, 당시에는 그들이 역적으로 죽었으므로 그들이 쓴 글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다가 나중에 비로소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꾸미면, 그 내용에 큰 권위가 생기면서도 그 진정성이 설득력이 있게 보이고 그 동안 그런 중요한 내용이 세상에 있지 않았던 이유를 꾸밀 수 있으니 일석삼조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자세한 내용으로 들어가서 검토해보니 설원기의 거의 모든 부분이 문제가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설원기의 비평 내지는 비판은 이곳 홈페이지(http://kenji.cnu.ac.kr/ryu/)에 이미 자세히 밝혀놓았으니 관심 있는 분께서는 참고하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한 저명한 역사학자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주장에 더해져서, 설원기가 사료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문헌임이 다시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확정되리라 믿습니다.


    2. 이수건 선생의 논문: "차원부설원기"는 위서(僞書)

    저에게 영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 류영철(전주류씨) 선생께서 이수건 선생이 쓰신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이라는 논문이 "대구사학" 86집(2007년 2월)에 실렸으며, 그 내용에 차원부설원기가 다루어져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논문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논문의 저작권이 "대구사학"에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따라서 그곳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제가 전문을 공개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공학분야에 있는 사람이라 그동안 글을 읽다가 몇 번 이수건 선생의 이름과는 마주쳤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만, 영남대 명예교수이셨다가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사계에서 상당히 권위 있는 분이라 합니다. 그 분이 계획하셨다가 완성하지 못한 논문을 제자가 정리해서 낸 논문이 바로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이라 합니다.

    제목이 말하듯이 이 논문은 조선시대에 활발하게 간행되기 시작한 족보 등에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조작하거나 그 내력이나 신분을 조작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성씨의 관향(貫鄕)을 동일한 성씨를 쓰는 다른 유력한 집안의 관향으로 바꾸는 등의 신분 관련 조작이 극심하게 자행되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柳씨에 대해서는 "그러나 德水李, 潘南朴, 杞溪兪, 海平尹, 豊山洪 ·金 · 柳씨 등은 이미 조선초기에 명문사족으로 기반을 굳혔기 때문에 본관의 폐합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본관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연안차씨에 대해서는 "黃州邊氏, 延安車氏, 盈德鄭氏, 驪陽陳氏, 忠州池氏, 牙山蔣氏 등은 본래 그 본관 군현의 관내 某村姓으로서 『실지』(세종실록지리지)의 각 읍 성씨조에 기재되었던 것이 나중에 주읍을 새 본관으로 한 예"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명문사족으로 성장했거나 훌륭한 조상을 둔 가문은 자신의 관향을 바꾸지 않았는데 그렇지 못한 가문은, 당초에 관향이 작은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었을 때 더 큰 지역의 이름으로 관향을 바꾸어서 관향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꾀했는데, 여기 언급한 성씨들이 그 예라는 말입니다. 차원부설원기는 차원부의 계통의 권위를 확실하게 류씨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논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조선시대에 류씨들은 확실히 명문거족이었으며 연안차씨들은 그렇지 못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수건 선생은 조선시대의 사림(士林)계가 지나친 모화(慕華)사상(중국 숭배 사상)과 우리나라의 역사서들을 부정하는 태도와 역사의식을 지녔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 배경 하에 "차원부설원기" 같은 책이나 사실들이 많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차원부는 또 두문동 72현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두문동 72현은 거의 후세의 창작입니다. 이수건 선생은 "두문동 72현 문제와 같은 조작된 사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원기를 상세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논문은 설원기의 내용과 그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車原부雪寃記』에 의하면 車 · 柳 양 성관은 고려 태조공신 車達의 두 아들에서 갈린 같은 뿌리로서 장자 孝全系가 車氏성을, 차자 孝金系가 柳氏성을 각각 취하였다. 그리고 차원부의 先代世系가 箕子시대까지 소급, 기재되어 있다. 이 『차원부설원기』는 편찬 내지 간행 · 반포된 뒤에 조선후기 각 문중들이 그 기재 내용을 당시의 역사사실로 확신하고 조상유래와 족보편찬에 중요한 사실로 전재, 인용한데서 한국의 성관 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후기 조상들의 전기 · 狀碣文 작성과 족보편찬에 있어 온갖 조작과 협잡이 동원된 것도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설원기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그 3부자(車軾 · 天輅 · 雲輅의 3부자를 지칭함)에 의해 조작된 위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극소수지만 이미 그런 주장을 했던 조선시대의 몇몇 선각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논문은 설원기가 류씨와 차씨에게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고, 그 위작 동기, 위작 시기, 위작자, 위작 경위, 유포과정 등에 관해 논하며 다음과 같이 추정 또는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 위작자: 차씨 3부자
    * 위작시기: 16세기 후반
    * 위작동기: 차씨들의 한미한 가계(家系)를 돋보이게 하는 보상심리.
          차씨 3부자가 문재(文才)는 뛰어났지만 좋지 못한 성품을 지녔고 중용되지는 못했음을 배경으로 함.
    * 위작내용:
          - 류씨와 같은 뿌리임을 조작함.
            이를 위해 서희, 정지상, 김방경의 책들을 조작하여 거짓으로 거론함.
          - 차원부 선대가계가 고려 후기 200년 동안 명문이었다고 조작함.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위조해도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 차원부 일가의 가해자로서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을 4얼[네 명의 얼자(첩에게서 난 아들. 서자)]로 조작함.
          - 설원기를 편찬한 인물로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등을 제시하여 단종복위사건을 이용함.
          - 4얼을 등장시킨 것은 오히려 16세기 중엽의 조작임을 보여줌.
            (16세기 중엽에는 얼자들이 배척을 받았지만, 여말선초에는 권문세족의 내외조상에는 서얼들이 많았는데,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16세기 중엽의 관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결과라는 의미임.)
          - 설원기에는 차원부 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 가해자들(4얼)이 서얼계란 사실이 기재된 족보가 해주 신광사에 있다가 소각되고 말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한국 족보사에서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
          - 차씨와 류씨가 同祖(同源: 조상이 같음)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임.
            (이에 대한 주석에서, 저자는 차씨의 본관과 역사적인 차씨 인물들을 살피고 있음. 그런 차씨 자체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류씨와 같은 조상일 가능성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음.)
    * 위작 및 유포 경위: 류몽인(고흥류씨)이 광해군초에 "車軾의 神道碑銘"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차원부에 대한 얘기와 그 선대세계의 얘기가 적혀 있음. 이것을 보면 天輅 형제가 先考(車軾)의 비문을 柳夢寅에게 청탁할 때 家狀 또는 行狀을 제시하였고, 류몽인은 천로형제가 제시해 준 가장을 바탕으로 신도비명을 지었을 것임. (류몽인에게 보인 가장 또는 행장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미.)
    * 결론: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 인물들의 행적이나 序 · 記文, 48인의 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이 책을 위서로 단정하지 못한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문헌 고증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선현 · 선조들의 의리와 충절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양 일변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확실한 주장들을 보면 이 논문은 아주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차원부설원기의 허구성은 의심할 수 없기에, 그것에 입각했던 관념들, 지식들은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3.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관련

    논문에 나온 차원부설원기 관련 얘기는 이 정도로 소개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논문에는 문화류씨에 관련되는 주장도 들어 있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4세기 이래 지방의 토성이족에서 성장한 성관이나 한미한 가계에서 권문세족으로 성장한 가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기 선조의 유래와 得姓 사실을 조작하거나 부회하는 예가 많았다. 가령 文化柳氏 · 安東權氏 · 全義李氏 · 善山金氏 등의 시조 성명이 柳車達 · 權幸 · 李棹 · 金宣弓 이라는 字義를 두고 각기 그럴듯한 해석을 가하여 改姓 · 改名사실을 부회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이런 주장은 이수건 선생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몇몇 본관들이 조상들을 고려초기의 삼한공신들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문화류씨는 그런 직접적인 지적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곧 문화류씨의 시조로 류차달을 상정하는 것은 연대적으로 합치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에는 구체적으로 적시되지는 않았지만, 류차달에 관한 기록, 곧 수레(車)와 양곡으로써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서 삼한공신이 되었다는 전승은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논문의 이런 주장에 대해 저는 그 정신, 곧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선조들에 대한 조작의 배척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은 '실제 사실'을 무언가 상정하고 그와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실제 사실'이라는 것이 겨우 남아 있는 "고려사" 같은 제한된 사서에 기록된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지는 못했을 것이고 또 기록된 것들이 전혀 지금까지 모두 남아 있지도 않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사실'을 이루는 것일까요. 저는 큰 규모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한 가문의 전승이 충돌된다면 전자를 취할 수밖에 없지만 충돌하지 않는다면 후자의 가치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류차달은 "고려사"에 등장하긴 하지만 일차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신 류공권(柳公權, 1132-1196)의 설명에 "류공권의 자는 정평(正平)이며 유주(儒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차달(車達)인데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사는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조정의 작품이지만 특히 인물들의 묘사에 엄밀함을 가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차치하고라도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이 없는 류공권의 선조에 대한 기록에 있어 고려사의 기자(記者)들이 일차적 사료들을 보고 기록했을 것이 확실한데 그 기록을 지금 무시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후에 류릉(柳陵)으로 불린 류차달의 무덤, 고려시대 후기지만 지금 전해오는 몇몇 금석문들, 그리고 관련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계룡산 동계사 등의 여러 요소들이 류차달의 역사성을 부인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류차달이 2등 개국공신이라고 문화류씨의 현존하는 족보 중에 최고 권위를 갖는 족보인 가정보에 나와 있으며, 다른 성씨의 족보들에도 여러 군데 실려 있습니다. 가정보는 문화류씨라는 하나의 성씨의 족보의 수준을 넘어서는 객관성이 뛰어난 괄목할만한 족보이기에 거기서 조상을 높여 꾸미기 위해 처음으로 단순한 공신을 2등공신으로 조작해서 넣어놓은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려 태조 때부터 이미 높은 공신이었을 가능성도 물론 있고, 고려 공신들은 고려시대를 내려가며 그 명단이 계속 정비되고 추가로 선정되고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공신이었다가 후에 언젠가 2등 개국공신으로 재평가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조선 초기에 조작이건 아니건 간에 류차달이 개국공신에 들어 있는 공신록(功臣錄)이 존재했었음은 확실하게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 15세기 초의 문헌들에 이미 류차달이 삼한공신임이 적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록은 일반인들이 보기 어려웠을 터이지만 조선의 조정에서 국가의 공식 역사서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고려사"는 볼 수가 있었습니다. 류차달이 공신 중에서도 2등 개국공신이라고 못 박은, 가정보에 보이는 명단은 누군가가 삼한공신이라는 일종의 국가적 공인(公認)에 입각해서 기존의 명단을 재구성한 것을 인용한 결과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후손들이 조상을 꾸며 2등 공신으로 높였다고 가정해도 일종의 공신이었음은 부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류차달이 지방의 호족이었음을 부인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는 데서 출발합니다. 지방의 호족들은 고려 초기의 융화정책에 의해 관작과 공신의 대우를 받았기에 그렇습니다. 류차달은 고려시대에 이미 확실하게 시조로 숭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호족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하며, 이런 사실들이 금석문(비석의 글)으로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가장 넓게 말하자면, 고려의 건국에 어떤 역할을 해서, 특히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려는 왕건의 정책에 따라, 개국공신과 삼한공신으로 선정된 인물들이 고려사에만 해도 수천 명이라 언급되어 있기에 류차달이라는 인물이 태조를 돕는 어떤 역할을 했고 삼한공신이 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거기에 왕건의 통일 전쟁에 어떤 일정한 역할을 했다면 그 대우가 더욱 확실했을 것입니다. (‘차달'이라는 이름에 관한 것 등, 더 자세한 것은 이곳 홈페이지에 다루어 놓았습니다.)

    시조에 관해 후대에 덧붙여진 것들이 있습니다. 호나 자나 초명(初名), 생몰년대, 심지어 사주까지 있는데, 이런 것들은 후손들이 붙인 것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갖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시대에는 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호를 하나 또는 심지어 수십 개까지 갖고 있었는데 거룩하신 시조가 호가 없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어떤 분이, 신라말-고려초는 호가 사용되지 않던 시절이기에 호가 있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역사인식은 갖지 못한 채, 시조의 무덤 근처의 산봉우리인 아사봉(鵝沙峰)을 보고 넌지시 호를 '아사'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4. 맺음말

    이상 이수권 선생이 논문에서 "차원부설원기"와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에 관해 다룬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한 성씨의 가문사를 가급적 좋게 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인정해도 거짓을 바탕으로 그런 일이 이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성씨들의 족보들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천은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조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히 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류씨는 이번에 발간하는 대동보에 "차원부설원기"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는 입장으로 선계(先系)를 정리하는 큰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문화류씨 시조는 류차달이며 그 아들은 한 분 효금(孝金) 뿐입니다. 그리고 시조 위의 조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실은 이것이 바로 시조가 의미하는 모든 것입니다.

    저는 감히 문화류씨 문중이 몇 백년에 걸친 사기극에 놀아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의건 타의건 사회에 끼친 해악이 대단합니다. 물론 그 오랜 세월동안 "차원부설원기"를 지식인과 학계에서조차 감히 위작이라 주장하지 못해왔던 분위기와 완전히 맞물려 있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허다한 문헌과 요즘의 인터넷조차 거짓 가문사(家門史)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을 고쳐 진실의 역사를 밝히고 그 진실에서 참된 발전의 힘을 발견하고 나아가는 대장정이 이제 겨우 시작되었습니다. 그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 대장정에는 많은 분들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부디 함께 하여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2007. 3. 24.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Home: http://kenji.cnu.ac.kr/ryu/
    E-mail: juwhan@cnu.ac.kr

    2009.01.19 신고 의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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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디로 말해서 명문가에 빌붙어 살아 보자는 얄팍한 술수를 썼던 거지요.

    연안차씨 전체가 공중에 분해가 될 모양 인데 이거 어쩝니까?

    왜 사극에 보면 그런거 있잖아요. 족보 훔쳐서 양반행세 하는 일들요...

    그런 차원에서 시작된것인데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가 본데요.. 남에성을 훔치는것 보단 빌붙으려 한걸보면요,

    그래도 너무 했죠...

    남에 조상을 싸그리 말아먹으려 했으니...

    이젠 어쩝니까?

    연안차씨들이 굳게 믿고 있는 차원부설기 조차 위작 이라 판명 됐으니...

    무얼 믿고 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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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부터 족보(또는 조상) 조작이 자행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조상의 업적 조작이 유행처럼 번졌고 일제시대에는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해방후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조상(족보) 조작은 사그러질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실기(實記), 행장(行狀), 묘지(墓誌), 묘갈문(墓碣文), 연보(年譜), 가승(家乘), 분재기(分財記) 따위를 조작, 날조하여 증거라고 제시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근대적인 계급주의 의식 때문입니다. 즉 몸은 21세기 자유평등민주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사고방식은 아직도 몇 백년 전의 전제계급군주주의 사회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양반"의 후손이요, 충신, 절신, 학자, 효자의 후손들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뛰어난 상류층"의 후손들이니 참으로 기뻐해야(?) 할 일일는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차원부 설원기" 문제는 이수건 교수의 주장과 류주환 교수의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즉 "차원부 설원기"는 조작의 의심을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차원부 설원기"가 조작이 아니라 사실(事實/史實)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이수건 교수와 류주환 교수의 주장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밝혀야 할 것입니다.


    역사 뿐만 아니라 모든 "주장"에는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제시되어야 하며 과학적 입증을 통해 논리적으로 결론이 도출되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자료의 제시나, 설득력 있는 논리도 없이 타인의 주장을 감정적으로 몰아치거나 욕설을 퍼붓는 행위는 곧 자신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조상과 관련되는 경우,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명백한 증거와 논리적 추론에는 승복해야 합니다. 비록 경우에 따라서 정서적으로 승복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욕설을 퍼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수건 교수와 류주환 교수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증거와 논리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수건 교수와 류주환 교수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2018.04.04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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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내가 어떤 글에 柳의 뜻 가운데 '큰 수레'라는 뜻이 있다고 썼더니

    어떤 수준 낮은 친구가 그게 바로 류차동원설의 증거인 양 떠들어서 친절하게

    견강부회 하지 말라고 타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그런 취지의 답글들을 보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류차동원설은 이미 철저한 역사적 사료의

    검증을 통해 위조임이 드러난 주장입니다.


    한자로 표시되는 우리나라의 성씨들(한성漢姓이라 부름)은 대부분 지나(China)의

    성을 모방한 것임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들이 각기 어떤

    연유로 특정한 글씨를 선택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몇 개의 설화는

    존재합니다만, 설화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柳씨가 왜 그 글자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車씨가 왜 그 글자를 선택했는지는 아무런 역사적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둘 모두 위조된 이야기는 있습니다.)


    지나에서는 柳씨는 원래 어떤 지방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며, 車씨는 어떤 승상과

    수레 관련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지나 성들은 같은 글자로

    표기되는 우리나라 성씨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차원부설원기"의 문제점은 인터넷 검색해 보면 잘 나옵니다. 누구나 판단력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12.02.28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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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조선 살학자와 2000년대 학자들에 의해서 [차원부설원기]는 위서로 판명이 났습니다. 따라서 원파록도 위서이므로 

    5,000년 전 중국의 황제 헌원의 희씨 사씨 조선의 왕씨 차씨 류씨 5성이 동조이성이란 것도 완전 위조된 것입니다.

    1. 남극관(南克寬 !689~1714)의 몽에집{夢囈集} 잡저(雜著)편에 [설원기]가 비루하고 교만하며 위작되었다고 처음 판단

    2. 이익(李瀷 1681~1783)[설원기]속 내용을 의심하면서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모호하

    3. 홍계희(洪啓禧 1703~1771)1768(영조 14) 하위지 유고집을 간행하면서 [설원기(雪寃記)]가 위직임을 언급하고 서 문을 싣지 않았다.

    4. 윤광소(尹光紹 1708~1786)는 선조인 윤중의 문집에 실린 [설원기]의 내용은 위작이라고 자기 문집에 싣지 않았다.

    5. 하진현 1776-1846  설원기를 위서로 논증

    5. 이수건교수 2007 설원기를 위서로 논증

    6. 류주환교수 2005 설원기를 위서로 논증

    7. 김난옥 2007 설원기를 위서로 논증

    8. 박은정 2010 설원기를 위서로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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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이란 어떠한 주제에 대해 저자가 자신의 학문적 연구결과나 의견, 주장을 논리에 맞게 풀어 써서 일관성 있고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쓴 글을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논문이라고 발표하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논문도 논문 나름 입니다.논문을 쓸 때에는 직관적 사고와 논리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주제를 정할 때는 새롭거나 신선하거나 충격적인 발상을 하거나 기존사안에 대한 역발상을 하는 식의 직관적 사고가 필요 하고 논문을 써 나갈 때에는 논리적 사고에 근거하여 작성해야 연구를 통해 신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주제의 논문이든 우린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를 좋은 뜻으로 참고하면 됩니다 문제는 문화류문이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학술적 연구 목적으로 발표한 논문을 가지고 차문의 명예를 훼손하고 심지어 위키 백과사전의 내용에 까지 일방적인 요구를 한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련 논문을 보면 "아마"라든지 "단언하기 어려우나"라는 말을 사용하여 논리의 주장을 조심스러워 합니다

    위키 백과사전 담당자도 이미 압력을 받은 듯 보입니다. 어떤 사안을 수정할 때는 중립적 입장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차원부설원기 설명에 류모교수의 너무 일방적 주장(박은정, (고)이수건의 논문을 그대로 인용)을 옮겨 놓아 백과사전의 편집이 이상해 보입니다. 차원부설원기설명엔 류모교수의 주장을 빼고 류모교수의 주장은 비고나 참고란에 차원부설원기를 위서로 주장하는 논문이 있다고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위키 백과사전 담당자에게 조속한 수정을 촉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을 품고 설치니 어떻게 통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집안 문제로 이전투구를 한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문화류문의 도가 지나친 주장을 해도 가만히 있으면 더 날 뛸 것 같아 대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14.04.27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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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논문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그 논문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조목 조목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논문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매모호한 말로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욕설이나 저급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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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차 문제와 관련하여 류씨가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부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결국 류씨의 족보인 가정보(1562)에 차원부와 관련된 원파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래 류씨가 가지고 있던 기사보(1689년)에는 원파록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정보가 새로이 발견되었을때는 거기에 차원부에 관한 원파록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언급을 하면 가정보(1562년)에 차원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단종의 지위가 복권된 것이 효종때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 의해 1680년부터 논의되기 시작 결국 숙종(숙종24년 1698년)때 복위되어 묘호가 단종으로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중종때 논의가 있었지만 실패하고(중종반정을 생각해 볼것) 효종 이후 노론에 의해 주장되기 시작 숙종때 빛을 본거죠. 따라서 가정보(1562년)를 쓸 당시에는 단종이 아직 복권되지 않은 관계로 류씨입장에서는 차씨와 연결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종 역시 반정으로 왕이 된 사람이고 명종의 엄마인 문정황우가 인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구요. 중종때 단종 복권이 실패했고 명종의 즉위도 정당성에 문제가 있는 시점이라는 점 나아가 문화류씨의 유성원이 사육신으로 이미 피해를 봤다는 점이 가정보가 쓰여질 당시 단종을 옹호하던 신하와 오버랩되고 나아가 고려건국을 반대했던 차원부까지 추가적으로 자신의 조상과 연결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훈구대신들이 정계에 뿌리는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미움을 굳이 더 받을 필요는 없다. 더욱이 그들이 서얼출신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는 차원부와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독재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을 일반적인 차원으로 높이는 것과 그 사람을 자기 성씨와 연결시키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일 수 있는 것이죠.


    특히나 단종 복위를 주도한 것이 송시열의 노론이었기 때문에 남인계열은 실학자는 노론에 의해 출사의 길이 막힌 관계로 정치적 반대점에 있기 때문에 한번정도는 걸려 봐야 합니다. 남극관이나 윤광소는 소론계열로 그들도 노론과 대척점. 더구나 홍계희 같은 경우는 노록 벽파지만 송시열이 사망 이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으로 단종을 죽인 케이스와 너무 유사합니다. 하진현은 하륜의 휴손. 노론 송시열에 의해 단종이 복원되자 그 뒤 본격적으로 차원부설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게 먼가 정치적 냄새가 나죠.


    무엇보다도 가정보에는 안나오던 것이 바로 1680년 송시열에 의해 단종 복위가 논의되기 시작한 이후인 기사보(1689년)에는 차원부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원파록이 드뎌 실리기 되죠. 그리고 1698년 단종은 실제 복위됩니다. 아무튼 사회 분위기라는 게 단종 복위를 바라는 시점이라 그런 것이 아닌가 하네요. 기사보에는 이제야 원파록을 실었고 그걸 연구해보라고 합니다. 실제 단종이 복위되자 그 뒤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금까지 왔어요.


    근 200년 가까이 금기시 된 단종 복위와 관련된 차원부설원기는 사실 200년간 역사적으로 문언적으로 그게 정확히 전승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 있는 문헌이 그리고 200년 이후에야 비로서 정치적으로 차원부 설원기나 원파록을 당당히 언급할 수 있는 시점에 많은 부분에서 고증적 차원의 한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차원부를 죽인 것은 하륜아닙니까? 하륜은 생몰연대를 1347(충목왕조) ~ 1416(태종조)입니다. 하륜이 죽였는데 정도전이나 기타 인물은 언급하는 건 좀


    《대동운부군옥》현재 전하지 않는 많은 고대문서를 참조한 것으로 나온다. 《해동잡록》 등을 필두로 하여 많은 문헌에 차원부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 《해동잡록》을 예로 들면, 차원부의 죽음에 대하여 황보인(1387~1453)은 관모를 거꾸로 쓰고 임금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였고, 정갑손(1402~1497)은 애도시를 남겼으며, 성삼문(1418~1456)은 두 편의 시를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원부설원기에서 조선의 주요 건국세력이 서얼출신이라는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적 관점에서 볼때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게 정말 차씨 측에서 그런 내용을 위조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차씨가문의 출사나 기타 주요 관직승진에 스스로를 불리하게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차씨의 집성촌을 보면 대부분 깊은 산골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걸 위조했다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앞뒤가 좀 맞지 않다.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은 비록 차원부를 충절의 인물로 묘사하므로 잠시 기분이야 좋겠지만 정작 그 후손들의 출세에는 심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데 굳이 이걸 위조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다는 것이다. 조선의 주요 건국세력 자체와 척을 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조선 건국의 주요세력이 성리학적 기본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차원부설원기에 통일신라시대 승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는 것을 가지고 위작이라는 시비가 있었다

    그런나 실제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재상급 고위관료들에 승상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三國遺事 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의상전교(義湘傳敎) 의상이 귀국하여 국난을 면하게 하다(670년 (음)) 이미 본국의 승상(承相) 김흠순(金欽純)

    三國遺事 卷 第五 제6 신주(神呪第六) 밀본최사(密本摧邪) 밀본이 귀신을 쫓아 김양도의 병을 고치다 승상(承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린 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차원부설원기의 위작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차천로가 위작을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차식 차천로 차운로 3부자를 든다. 그러면 실록에 있는 몇몇 안좋은 기록과 신분상승의 욕구를 강조한다. 문제는 차천로가 서경덕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선조당시는 이조전랑 문제로 동인(이황계열)과 서인(이이계열)이 갈리는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서경덕 문하가 신분상승의 욕구가 강했다고 보는 건 좀 의아스럽다. 특히나 앞에서 언급했드시 차원부설원기 내용은 출세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적을 더 많이 만들 가능성이 높다.서경덕이나 조식은 주자학만을 절대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차문은 숙종에 의한 단종복권이후에 관직에 많이 등장하고 그 전에는 가끔 등장할 뿐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도 서경덕을 옹호하던 허엽의 논변에 이황과 이이가 까는 글이 나온다. 주자는 둘째치고 정몽주 장재보다 낮다는 것이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조의 내용이다.


    "허엽이 경덕을 대단히 높이어 기자(箕子)의 학통을 이을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이가 그의 학문을 횡거에게서 나왔다고 논하는 것을 듣고 이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학문은 소옹(邵雍)·장재(張載)·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문을 겸하였는데 어찌 함부로 논하는가.’ 하였다. 허엽이 일찍이 그의 학문은 횡거에 비길 만하다고 논하였는데, 이황(李滉)이 ‘서공(徐公)의 저술을 내가 모두 보았으나 정몽(正蒙)에 비길 만한 글이 어느 글이며, 서명(西銘)에 비길 만한 글이 어느 글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허엽이 힐난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소옹·장재·정자·주자를 겸할 만하다 하여 그의 의논이 더욱 집요하였는데, 상의 하교에 이른바 칭찬이 공평을 잃었다는 것이 지당하다."


    육신전(나무위키에서 검색)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선조나 그 전 명종대에 왕들이 사육신 생육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왕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차천로는 바로 선조때 인물이다. 그런데 차천로가 육신전을 보고 위작을 했다고 하는데 선조의 육신전에 반응은 싸늘 그 자체이다. 링크의 표현을 빌자면 선조의 반응은 더도 덜도 아니고 '역적을 두둔하고 왕실을 모욕하는 불온서적'으로 보는 것이었다. 차천로가 자기 가문을 높이고 나아가 출세를 위해 육신전을 보고 위작했다는 건 그것이야말로 한참 잘못되어도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중종 명종 때부터 나아가 선조까지 여전히 사육신(안의 성상문에 대한 평가를 보라) 생육신등은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껄꺼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문서의 진실성은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 200년 가량 정치적 문서로써 조선왕조의 임금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 사안이었고 또 내용이었다. 이 경우 후대의 사람들이 원본 자체를 진실성을 위해 현재 자신이 가진 사본의 내용이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과 다르면 그에 맞게 고치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성경이나 기타 여러 고문서에서 일반적인 현상에 속한다. 특히나 육신전이라는 소설이 그 당시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은 더욱 더 그러한 가능성을 높혀주고 여러 이본의 유통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도 원본이 없는 관계로 여러 이본이 유통되었고 비로 예수의 존재자체는 사실이라 하더라고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가필이 존재해왔다. 그걸 나중에 카톨릭 교회에서 다시 하나로 묶는 작업이 있었음에도 현대에서 그 문제는 여전히 골치거리에 속한다.(대표적인 것이 삼위일체에 관한 표현을 들 수 있겠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와 신라에 관한 그 당시에는 존재했던 문서가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쉬운 예로 문화 류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인 영락보는 부전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것은 명종때의 문화 류씨의 가정보와 성종때 안동권씨 성화보가 있을 뿐이다. 영락보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가정보만을 기초로 한 논의자체가 역시나 역사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2016.09.14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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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itemIds=&indexSearch=N&codeId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B0%A8%EC%95%BD%EC%B6%98&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r/kr_101r_0010_0080_0010/634081/0/1


    고려사 열전 권제 14


    차약송


    차약송(車若松)의 아버지는 차거수(車擧首)로 직사관(直史館)을 지냈다. 차약송과 그 형 차약춘(車若椿)이 모두 어렸을 때 차거수가 말하기를, “약춘이는 문예(文藝)로 입신(立身)하는 것이 마땅하니 학문에 힘써야 할 것이고, 약송이는 무재(武才)로 이름을 날릴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과연 차약춘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고, 차약송은 금위(禁衛)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명종(明宗) 때 낭장(郞將)을 거쳐 장군(將軍)에 임명되었다. 중방(重房)에서 아뢰기를, “경인년(1170) 이후로 무관(武官)이 모두 문관(文官)을 겸임했는데, 내시(內侍)와 다방(茶房)만은 유독 겸임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겸임을 허락해주소서.”라고 하자, 왕이 차약송 등 43명에게 내시와 다방을 겸하게 하였다. 무관이 〈내시와 다방의 직을〉 겸임하게 된 것은 차약송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차약송은〉 신종(神宗) 초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고,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 叅知政事)로 승진하였다. 차약송이 기홍수(奇洪壽)와 함께 중서성(中書省)으로 들어가 조회(朝會)를 마치고 차약송이 기홍수에게 묻기를, “공작(孔雀)은 잘 있는가?”라고 하자, 〈기홍수가〉 대답하기를, “생선을 먹다가 목구멍에 뼈가 걸려 죽었네.”라고 하고는 이어서 모란을 기르는 기술을 묻자, 차약송이 그 방법을 모두 알려주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재상의 직분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論道經邦]에 있는데, 단지 꽃과 새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으니 어떻게 백관(百官)들의 모범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차약송은 뒤에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중서평장사(開府儀同三司 守太尉 中書平章事)로 있다가 죽었다. 차약송은 기생을 첩으로 두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국학(國學)에 들어가 복응재(服膺齋)의 생도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유품(流品)으로 들어갔다. 최충헌(崔忠獻)이 몰래 어사대(御史臺)를 부추겨 왕에게 아뢰어 그들을 영관(伶官)에 소속시켜 7품으로 제한하였으며, 학적(學籍) 또한 삭제하였다


    =======================


    차약송은 무관이었지만(나아가 그시절 무관은 문관 겸직) 명종때부터 이미 시호로 문절공까지 다 받았고 그 형 차약춘은 문과에 합격 병부시량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족보를 가필한다는 것인지.



    차척, 차송우, 차포온이 모두 시호를 받고 고려사에서 검색이 가능


    그리고 차원부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옴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12020_006


    우리 공정 대왕(恭靖大王)이 차원부(車原頫)197) 에게 사제(賜祭)한 것처럼 하여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쾌하게 하소서. 그렇게 되면 군신(君臣)의 대의(大義)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영경의 본심도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註 197] 차원부(車原頫) : 고려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가 주는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거절하고 벼슬도 사퇴하였다. 뒤에 하윤(河崙) 등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정종이 차원부에게 사제했다는 저런 표현을 상소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진실임을 자신하지 않고는 함부로 못하는 것. 저기서 공정대왕은 정종을 의미.

    2016.09.11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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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원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본문의 말미에 “景泰七年五月十七日嘉靖大夫行刑曹參判臣朴彭年奉 敎謹記” 곧, “1456년 5월 17일 가정대부 행 형조참판 신 박팽년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삼가 기록했다.”라는 봉교 주를 한 박팽년의 관직을 나타내었으나 일부 학자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경태 7년 5월 3일에 박팽년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라는 한직(閑職)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라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주장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자세히 보면 이 주장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8월 5일 갑신 3번째기사 / 조혜·강맹경·이인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이인손(李仁孫)을 호조 판서로, 정척(鄭陟)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심회(沈澮)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이보정(李補丁)을 예조 참판으로, 박팽년(朴彭年)을 형조 참판으로, 안숭직(安崇直)·한서룡(韓瑞龍)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우효강(禹孝剛)을 인수부 윤(仁壽···

    6.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1월 10일 신사 1번째기사 / 윤사윤·박팽년·김순·황효원·윤사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윤사윤(尹士昀)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파성군(坡城君)으로, 박팽년(朴彭年)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김순(金淳)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황효원(黃孝源)을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윤사분(尹士昐)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삼았다.

    7.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12일 신사 1번째기사 / 사정전에 나아가 신숙주·권남에게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다···黃守身)·예조 판서 김하(金何)·형조 판서 권준(權蹲)·호조 참판 권자신(權自愼)·병조 참판 홍달손(洪達孫)·공조 참판 우효강(禹孝剛)·대사헌(大司憲) 노숙동(盧叔仝)·형조 참판 박팽년(朴彭年)·예조 참판 하위지(河緯地)·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좌승지(左承旨) 구치관(具致···

    8.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4월 7일 병오 2번째기사 / 박평년·이영견·송석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박팽년(朴彭年)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영견(李永肩)·송석동(宋石同)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이종검(李宗儉)을 사간원 좌사간대부(司諫院左司諫大夫)로, 권기(權技)를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로, 이시원(李始元)을 우헌납(右獻納)으로 삼았다···

    9.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5월 3일 신미 3번째기사 / 노숙동·박팽년·신석조·송취에게 관직을 제수하다노숙동(盧叔仝)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박팽년(朴彭年)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신석조(辛碩祖)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송취(宋翠)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삼았다.



    여기서 보듯 박팽년은 단종때 형조참판이 되었고 세조때 다시 형조참판 형조참판 중추원부사로 임명한다


    박팽년이 설원기를 지은 5월 17일은 사육신 변고가 일어나기 딱 2주전이다.


    박팽년은 실제 자신이 글을 쓸때의 관직인 중추원부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단종과 연관이 있는 형조참판으로 해서 글을 썼을 가능성도 부정하기 어렵다. 즉 박팽년은 이미 세조를 임금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종이 폐위되기 전 제수한 형조참판을 의도적으로 적었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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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변

    고서적의 고증도 좋지만

    현재는 객관적으로 진위를 가릴 기술이 있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것입니다.

    류씨와 차씨 대종손 몇명의 샘플을 비교검토하면 됩니다.

    부계혈통은 Y 염색체 검사하면 됩니다.

    한뿌리에서 나온것인지 다른 뿌리에서 나온것인지 확인됩니다.

    은둔근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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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변

    (1) 정사(正史)자료, 족보, 실기, 묘갈, 행장 등의 기록(記錄) 시기(時期)를 분석하고, 그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몰(生沒) 연대, 관련사건, 당대의 정치/사회 제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가짜"를 판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석에 의존하지 않은 주장은 믿을 바가 못됩니다. 역사적 사실(사건)이 있은 후, 2~3세대 후에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나타난 기록(특히 인물 관련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2) (남성) 조상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는 Y-염색채 유전자 검사를 하면 드러난다고 들었습니다. (Y-STR 프로필 확인). (주)휴먼패스(http://www.humanpass.co.kr) 같은 검사 기관에 의뢰하면 된다고 합니다. 경비가 좀 들긴 하지만 아주 비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끝없는 논쟁만 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도 논쟁의 답을 찾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요?

    2018.04.04 수정됨 신고 의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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